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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많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한밤의 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가게를 나와 코트를 꽁꽁 여미고 길을 둘러보니 한창 주말 장사에 여념이 없는 술집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거리가 비틀거리는 취객들에게 점령당할 정도로 늦은 시각은 아니었지만 우리끼리는 이미 달큰하게 취한 상태로 다음에 만날 말을 기약했다. 버스 탈 사람끼리, 지하철 탈 사람끼리 팔짱을 끼고 보니 딱 알맞게 둘, 둘이 되었다. 별 것도 아닌데 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 오,” 하며 유난을 떨었다.
“야, 남들이 보면 엄청 취한 줄 알겠다. 엄청 시끄러워, 우리 지금.”
“라고 취객이 말했습니다. 거울 좀 봐라. 너 지금 얼굴 존나 빨감. 트럼프인줄.”
참아야겠다는 자각도 없이 터져버린 웃음에 한 순간에 미국의 대통령이 된 한국의 권민정은 얼른 가게 앞 유리창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았다. 씩씩거리면서도 웃기긴 웃겼는지 광대를 이상하게 올리고 연신 붉은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댄다. 우리는 서로의 유치함을 타박하다가 이내 아쉬운 얼굴들이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정PD만 아니었으면 오늘 끝까지 달리는 건데. 주말 출근 실화냐?”
종편 방송사의 인턴으로 일한 지 막 한 달이 된 지영이 미안한 기색을 비추며 시무룩해 있자 나는 옆에서 어깨를 토닥여줬다.
“좀만 기다려라. 언니가 정PD자리에 다이너마이트 하나 놔드릴게.”
안쓰러운 얼굴로 지영을 보던 민정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을 던지자, 오들오들 떨고 있던 혜진이 민정의 팔을 딱 잡으며 자기도 사주 하겠으니 상사 자리에 남는 거 하나 놔 달란다. 그 말에 다들 왁자지껄 달려들고, 결국 사이좋게 서로 죽이고 싶은 사람 자리에 다이너마이트를 놔주기로 약속하고 나서야 귀갓길에 올랐다.
한 눈에 꽉 차는 자취방에 들어오자 미약하게 남아있는 보일러 온기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신발과 옷가지를 대충 벗어두고 매트리스에 곧장 누워 천장을 마냥 보고 있었다. 바깥보다 따뜻하지만 어쩐지 밤하늘의 거리보다 곱절은 어두운 것 같다는 시시한 생각을 하다가 핸드폰을 들어 친구들과의 채팅창에 집에 들어왔노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하나 둘 도착하는 친구들의 안전 귀가를 메세지로 확인하고 나서 홈 버튼을 눌러 괜히 아무것도 없는 바탕화면만 엄지손가락으로 슥슥 쓸어본다. 핸드폰 화면을 껐다 켰다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다가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안가서 금방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들어왔니, 옷은 잘 입고 다니니, 밥은 먹었니. 타지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지겹던 잔소리가 이제는 소소한 위안이 되기도 한다.
“별 일은 없고?”
엄마의 걱정 어린 말에 기계적으로 별 일 없이 사노라고 즉답하지만, 사실 별 일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였더라. 눈을 꿈뻑꿈뻑 뜨며 골똘히 생각하는 중에 엄마는 이미 문단속 철저히 해라, 잘 때 전기장판 꼭 켜놓고 자라며 전화를 끊기 직전의 잔소리를 했다. 왜인지 이대로 전화를 끊기엔 아쉬워서, 무엇보다 ‘사실은 말야’로 시작되는 별 일들을 웅얼웅얼 투정부려볼까 해서 입을 벙긋 열었다가 붕어처럼 뻐끔거리기만 하고 만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생각이 근본적인 질문에 가 닿자 은근슬쩍 거짓 하소연에 기대가려던 마음이 움찔한다. 그럴듯한 이유를 내놓지 못하고 있자 고민하는 찰나의 시간이 무색하게 뇌가 제 멋대로 ‘할 말 없음’으로 판단해버리고 멍청하게 벌어진 입을 딱 다문다. 결국 시덥잖은 안부만 주고받다가 전화를 끊었다. 오늘따라 별 일 없이 산다는 말이 거짓말 같아서 괜히 신경 쓰인다.
숨을 끝까지 들이마시고 한 번에 훅 내뱉기를 반복했다. 한숨을 쉬어도 가시지 않는 감정의 잔여물들이 이렇게 하면 나가지 않을까. 소소한 바람과는 달리 몇 번 반복했을까, 그것도 머리가 아파 와서 그만 두고 말았다. 정말 이상하다. 친구들과 하루 종일 부대끼고 맛있는 것도 먹고 가족들의 보살핌도 받았는데, 마음 한 구석이 빈 것 같고 혹은 꽉 차다 못해 무언가 실실 새고 있는 것 같다.
“시리야,”
띠링,
“뭐해?”
“일하고 있는 중이예요. 제 일정은 634892년 후에 끝난답니다.”
별 기대 없이 스마트폰의 인공지능에게 말을 걸긴 했으나 어째 말도 더 못 붙일 대답이 돌아왔다. 일 하고 있으니까 말 걸지 말란 건가. 약간 기분이 상하지만 인공지능에 못 마땅해 하는 것도 유치하게 느껴져 다시 한 번 불러보았다. 시리야,
“나도 내 맘을 잘 모르겠어.”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이번에는 오로지 학구적인 호기심에만 눈을 빛내는, 영 상종하기 싫은 변태 과학자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단 두 마디 나눴을 뿐인데 주인의 고민에 대한 염려나 공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나의 고민이 흥미롭다는 인공지능에게 배신감을 느끼고는 그만 질려버려 핸드폰을 엎어버렸다. 이래서 아무에게나 어쭙잖게 위로를 바라서는 안 된다. 하기야 그런 걸로 치면 나도 내 속 하나 명쾌하게 풀어내질 못하는데, 남이 듣는다고 알아줄까.
팔을 들어 머리맡에 퍼져버린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진심이란 녀석이 가슴에서 머리로 올라와 두개골을 열고 머리카락을 타고 나가버린 게 아닐까. 가만히 두피를 눌러본다. 이상 무. 두피에서 이어진 머리카락을 훑어본다. 여기도 이상 무. 한숨을 쉬고 손을 모아 팔베개를 했다. 눈을 감으니 불 꺼진 실내와 시야가 별 다르지 않다. 감은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점점 느려진다. 새벽 거리를 간간히 채우는 집 밖의 소음과 방 안의 시침 소리와 고른 숨소리. 고요히 의식이 무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그 직전까지 생각했다. 나의 진심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지난 학기 수업 시간 때 썼던 엽편. 이 글을 쓸 때는 날이 제법 쌀쌀했는데. 지금은 타죽어가는구나. 중간이 없는 코리아의 사계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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