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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을 조여오는 두려움 속에서 이성, 공감, 오감, 그 모든 능력이 거세된 것만 같았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어두운 방 안의 검은 티비 화면 뿐이었지만 눈 앞에 닥친 상황은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오직 두려움만 남은 고동색 눈동자에 서서히 검은 복면을 쓴 채 자신을 돌아보는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번뜩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손톱에 기름때가 잔뜩 낀 두터운 손이 검은 복면을 잡아쥐었다. 마침내 얼굴이 드러난 그 잔혹하고 냉혈한 살인마가 입을 열었다.

'......'

자신뿐인 방 안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릴리 만무했지만 극한의 두려움으로 마비된 촉각은 그 살인마가 마치 그녀의 오른쪽 귓바퀴에 입술을 뭉개고 있는 듯 왜곡된 소름을 돋게 했다. 그리고 눈으로는 보았다. 묵음으로 처리된 입모양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 의미를 깨닫자마자 그녀는 각성한 조울증 환자처럼 눈을 번뜩 떴다. 차게 식다못해 혈관 속에서 얼어버린 백혈구 하나하나가 백 미터를 전속력으로 완주한 육상선수의 심장처럼 뜨겁게 뛰어 마침내 그녀의 몸 전체를 활화산에서 터진 마그마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녹아버릴 것 같은 느낌에 펄쩍 침대에서 튀어 나온 그녀는 시선을 어디에도 두지 못하고 숨만 몰아쉬었다. 마침내 방황하던 시선이 벽에 기대어 놓은 폴에 닿았다. 그녀는 시력이 돌아온 봉사처럼 눈동자를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뭉특한 폴의 끝을 바라보던 그녀의 거친 숨이 서서히 멎었다.

폴을 낚아채어 응접실로 곧장 향한 그녀는 잠시 창문 너머의 하얀 산을 봤다. 스키장의 조명을 받은 눈은 더이상 흰 색이 아니었다. 그건 흰 색 이상의 색이었다. 그러나 조명이 닿지 않는 산등성이는 높게 자란 침엽수 더미의 실루엣과 어두운 하늘만이 구분될 뿐이었다. 높게 자란 침엽수는 하늘의 앞에 있었다. 어두운 하늘보다 더 어두웠다. 더 짙은 어둠은 수채화 물감같이 묽게 번진 하늘에서 자신을 구분해 놓았다. 두려움에 몰려 스스로 오감을 거세했던 그녀는 이제 모든 감각에 회로를 연결한 듯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응접실 구석에 놓여진 큰 화분이었다. 화분에는 난초가 자라고 있고 주먹만한 석회암이 몇 개 놓여져있었다. 그 중에 하나를 집은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폴의 한 쪽 끝을 잡고 오른손에 쥐어진 석회암으로 쇳덩이를 갈아내듯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쇠와 돌이 마찰하는 소리는 그녀의 고막을 날카롭게 베어댔다. 콧 속으로는 쇳가루의 무거우면서도 시큼한 냄새가 들어왔다. 하얗게 질리도록 쇳덩이와 돌덩이를 집은 두 손과 팔뚝은 근육이 경련하고 있었다. 감지도 않는 눈가가 시려왔다. 그렇게 그녀는 계속해서 폴을 갈아내었다. 마치 폴 끝에 그 시려운 살인자의 눈동자가 머물었던 것처럼, 그래서 그걸 갉아내야만 하는 것처럼 계속.





내 블로그는 비공개 글 8 : 공개 글 2 이다. 그 중 비공개 글이었던 글조각 하나. 예전에 친구와 야간 스키를 타면서 보았던 한밤의 스키장 풍경을 기억하며 써놓았었다. 어느 나라의 한 스키장에 어떤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각자의 이유로 스키장에 와있던 사람들이 살인사건에 엮이게 된다는 이야기... 이 글 조각의 화자는 대한민국의 스키 국가대표로 낯을 가리고 예민한 20대의 젊은 여성... 스폰서의 압박과 경기보다는 스폰서의 눈치를 보기에 바쁜 코치진에 등 떠밀려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나 어릴 적부터 엄격한 코칭을 받고 자라 묵묵히 안으로 쌓아둔다. 소심한 태도를 보였던 여자가 핀트 나가서 눈 까뒤집고 누구보다 잔혹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이 장면 말고 또 보고 싶은 장면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밤중 폐쇄한 스키 코스를 타고 용의자를 추격하는.... 내 머릿속에는 박진감 넘치고..... 머찐.... 쩌는..... 그러한 장면인 것이다..... 쩌는..... <--- 내 어휘력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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